조선 후기 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.
[정의] 조선 후기 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. [개설] 김치삼은 탁영 김일손의 증손으로, 광해군 즉위 후 역모 혐의를 받은 임해군(臨海君)이 죽자 벼슬을 버리고 운문산 아래 도연(道淵) 가에 정자를 짓고 두문불출하며 경사(經史)에 전념하였다. [가계] 본관은 김해(金海). 자는 일지(一之)이며, 호는 도연(道淵)·인촌거사(仁邨居士). 증조할아버지는 탁영 김일손이며, 할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대장(金大壯)이고 아버지는 사과(司果)를 지낸 김장(金鏘)이다. 1560년 전라북도 남원의 월곡리(月谷里)에서 태어났고, 청도의 고성 이씨 이벽(李壁)의 딸과 결혼하여 청도로 옮겼다. [활동 사항] 김치삼(金致三)[1560∼1625]은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606년(선조 39)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사섬시 참봉(司贍寺參奉)에 제수되었다. 광해군 즉위 후 역모 혐의를 받은 임해군이 죽자 벼슬을 버리고 운문산 아래 도연 가에 정자를 짓고 두문불출하며 경사에 전념하였다. 무오사화로 인한 김일손의 죽음은 일족인 김대유와 김치삼뿐만 아니라 청도 지역 유생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, 16∼7세기의 청도에서는 처사(處士)의 삶을 지향하는 풍토가 뚜렷해졌다. 김치삼도 역시 벼슬길에 뜻을 두기보다는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닦는 일에 열중하였다. [학문과 저술] 성헌 백현룡(白見龍), 해월 황여일(黃汝一), 동리 김윤안(金允安), 검간 조정(趙靖), 오한 손기양(孫起陽) 등과 교유하였고, 1614년 김윤안·조정·손기양과 함께 운문산을 유람하였다. 현재 남아있는 김치삼의 작품에서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,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지은 것으로 파악된다. 특히 사마시에 합격한 뒤 올린 상소인 「청거왜사소(請拒倭使疏)」를 통해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. 김치삼의 문학 세계는 부(賦)와 시(詩)로 나누어 살필 수 있는데, 9편의 부에서는 시사(時事)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. 시는 대부분 운문산 아래에 도연정을 짓고 은거 생활을 하면서 느낀 즐거움을 노래하였는데,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「도연정 십경(道淵亭十景)」이 있다. [묘소]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(伊西)면 수야리 산110번지에 있다. [상훈과 추모] 전라북도 남원시 두동 서원에 배향되어 있다. 『도연 선생 문집(道淵先生文集)』 이상동, 『청도 한문학의 역사적 전개』(영남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, 2011)